마한의 유구한 역사에서 시작하여 빛가람 혁신도시까지 품은 나주는 과거와 미래가 맞닿아 있는 희망차고 역동적인 도시다. ‘교육이 아이들의 꿈과 희망을 현실로 바꿀 수 있다는 믿음’으로 학교마다 특성을 살린 교육과정을 운영하고, ‘학생들이 주도하는 학교문화’가 뿌리내릴 수 있도록 나주 교육은 힘과 지혜를 모아가고 있다. 더불어 배우며 미래를 일구는 나주교육에 희망을 기대해 본다. /편집자 주 다음은 서춘기 나주교육지원청장과 2019년 나주교육의 방향 등에 대한 1문 1답. 1. 유·초·중 교육을 맡고 있는 수장으로서 어디에 교육중점을 두고 있나? 나주교육은 학생 중심의 ‘더 더하는 학교, 더 나누는 학생’을 지향하고 있다. ‘더 더하는 학교’ 는 학생 한 사람 한 사람이 즐거움을 경험하면서 지적·인성·사회적으로 성장을 거듭할 수 있도록 힘이 되어주는 학교이며, ‘더 나누는 학생’은 서로 소통하고 나눔과 배려를 체험하면서 나눌수록 커진다는 삶의 지혜를 스스로 깨닫고 실천하는 학생을 의미한다. 이를 구현하기 위해 5대 교육지표와 4대 역점과제를 선정하여 충실히 실천해 나가고 있으며, 교육의 중심이 학생이 될 수 있도록 학교 교육활동 지원에 중점을 두고 있다.…
나주시는 전라도 정명 천년을 기념사업으로 추진하고 있다. 나주가 호남의 중심으로 새로운 천년을 여는 역사 문화의 도시로 재도약하기 위한 각종 행사와 사업을 기획 추진함으로써 지대한 관심을 모으고 있다. 지자체가 주도한 도시재생사업 성공사례의 모범인 전주시는 한옥마을을 브랜드로 해 관광산업을 활성화시켜 2016년~2017년 2년 연속 관광객 1천만 명이 방문했고, 외국인 관광객 수도 갈수록 늘어가고 있다. 나주시도 주목할 만한 일이 일어나고 있다. 나주시는 빛가람 혁신도시 시너지 효과와 관광객 유치 사업과는 별도로 지속적인 외국인 관광객 방문과 전국 각지에서 인구가 유입되고 있다. 외국인들은 고국에 돌아가면 나주시의 전도사가 돼 다른 사람들과 함께 나주를 다시 찾고 그들이 돌아가 더 많은 사람들이 나주를 찾아오도록 하고 있다. 이런 특별한 현상은 ‘나주 성모동산’이라는 성모성지와 새롭게 지어진 ‘성모경당’이 그 중심에 있다. 국내에도 가톨릭 성지가 99곳이나 있고, 해당 지자체에서도 종교를 관광 사업화해서 관광객 유치에 투자를 하고 있기는 하지만, 나주의 경우처럼 전 세계에서 고위 성직자들과 사제, 남녀 수도자와 수많은 순례자들이 자발적으로 매년 찾아오는 성…
산업시설용지의 입주가능 업종변경 통해 미분양 용지 활성화 추진 2020년 목포 부산 잇는 경전선 완성…남해안 벨트 물류 동선 개선 바이오산단의 면적, 사업기간, 사업총액(조성금액) 장흥바이오식품산단은 2012년 5월 1단계 조성공사를 마쳤다. 1단계 사업면적은 416,000㎡(12만평) 규모다. 이어 2016년 3월 2단계 790,000㎡(24.5만평)를 준공해, 총 면적 1,206,000㎡(36.5만평) 산업시설 부지를 갖췄다. 사업기간은 2008부터 2016년까지 9년간이며, 국비 795억원, 전남개발공사 1,596억원을 더해 2,391억원의 사업비가 투입됐다. 유치업종은 음·식료품, 목재 및 나무제품, 금속가공제품, 전기장비 의료·정밀·광학기기 및 시계, 기타 기계 및 장비 전기·가스·증기 및 공기조절 공급업 등이다. 바이오산단 현재 분양률, MOU체결업체 현황 장흥바이오식품산단 총분양 면적 1,206,000㎡ 가운데 분양면적은 407,867㎡로 총 34% 분양률을 보이고 있다. 현재 39개 기업이 분양계약을 마친 상태다. 이 가운데 15개 기업이 입주를 마쳤으며, 24개 기업이 입주를 준비하고 있다. 바이오산단 MOU 체결현황은 2008년 이…
그간 본지 편집국에 김재석 베드로, 이영숙 스테파니아, 김동명 알비노 등 성모동산 관계자들의 방문 그리고 본지에 대한 염려스러운 조언 등 편집국의 진지한 논의가 있던 사실을 감추지는 않는다. ‘신앙의 신비’가 ‘풀지 못한 수수께끼’가 아닌 ‘위대한 신의 세계에 대한 인간의 순명’ 으로 이해하는 본지 편집국은, 세계 곳곳에 보고된 성모 마리아의 발현, 물은 창조의 여명 이래 자연적 성사였다고 가르친 성 토마스 아퀴나스의 말을 거론하지 않더라도 성경과 현실 속에서 ‘성수’에 대한 기록과 증언이 풍부함을 알고 있다. 하지만, 나주 성모동산에서 일어나는 일련의 현상에 대해 종교적 ‘이중적 진리’에 휘말리고 싶지는 않다. 그렇다고 세계 각지에서 몰려드는 성도들, 그 들의 신실함과 불편한 순례 환경을 외면하지는 못하겠다.다만, 나주 성모동산 관계자의 성실한 노력과 프랑스 루르드의 성지 순례 경제적 관점에서순례자정미영 데레사의 글을 정리 게재한다. /편집자 주 오늘날 우리 세대는 극심한 물질주의, 이기주의, 신앙과 도덕 감각의 상실, 폭력, 낙태, 가정의 파괴뿐만 아니라 기상이변과 대 재난들 심지어 교회 안에까지 침투한 오류들로 인해 인류는 미증유의 위기에 처해 있다.
빛가람동, 혁신도시가 있기까지 광주 남구에서 남평을 지나 나주시를 향해 가다보면 허허벌판에 높은 빌딩들이 즐비하게 서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나주시 금천면 석전리・동악리・광암리・월산리 일부와 산포면 매성리·신도리·송림리 등을 통합하여 만든 빛가람 혁신도시이다. 법정동명은 나주시 빛가람동이다. 이 도시는 오랜시간 자연스럽게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2000년대 이후 계획적으로 설계가 되었고 건설되었다. 노무현정부는 국토균형발전을 공약으로 내세웠다. 이를 위해 신행정수도 건설을 표방하였다. 그러나 2004년 10월 21일 ‘신행정수도의 건설을 위한 특별조치법’이 헌재에서 위헌으로 결정되어 폐기되었다. 이후 노무현정부는 ‘행정중심복합도시특별법’을 2005년 3월에 제정・공포하였다. 이 법의 시행령은 5월 국무회의에서 의결되었는데, 행정중심복합도시의 건설을 위한 법적 기반이 마련되었다. 바로 이 법에 의하여 만들어진 것이 혁신도시이다. 이에 따라 11개 광역시・도별로 한 지역을 선정하도록 지침을 마련하여 발표하였는데 그러한 권역별 집결지에 붙인 명칭이 이른바 ‘혁신도시’이다. 노무현정부는 지역균형정책의 일환으로 신행정수도 건설과 행정중심복합도시를 구상하였다. 그런데…
농민운동의 시작 우리의 현대사에서 농업은 주요한 위치를 차지하였다. 지금도 농업은 중요한 산업 가운데 하나이지만, 실상은 중요하게 인식되지 못한다. 특히 세계적으로 ‘식량무기화’가 현실이 된다면, 농업은 여러 산업 중 큰 비중을 차지하지는 않지만, 중요한 산업임에 틀림없다. 우리의 먹거리를 제공하는 농업이 갈수록 소외되고 있는 현실에서, 농업에 종사하는 농민들도 여러 면에서 소외되고 있다. 그 첫 시작은 박정희 정부의 ‘저임금 저곡가’ 정책으로, 사람들은 농촌을 떠나 도시로 도시로 향하였다. 박정희는 집권과 함께 잘사는 사회의 청사진을 제시하며 가난에 찌든 사람들에게 ‘나도 잘 살아서 배불리 먹고, 아이들 교육도 잘 시키고…………’라는 사람들의 욕망을 자극하였다. 그러나 그 청사진은 현실이 되지 않았고, 모두가 잘 사는 사회는 오지 않았다. 상대적으로 도시가 근대화의 혜택을 더 많이 받았기에 농촌 지역의 사람들은 소외감을 느낄 수 밖에 없었다. 이는 1971년 당시의 신문에서도 도농간의 격차가 없는 발전을 요구하는 기사를 보아서도알 수 있다. 도시와 농촌간의 격차가 벌어지고 확인되기 시작한 1970년대 이후 농촌에서는 이런 불공평에 대한 비판의식이 싹트기…
전라도의 젖줄, 영산강 강이 흐른다. 사람들의 피와 땀과 눈물을 싣고 강물은 오늘도 흘러 흘러 간다. 영산강은 전라도의 젖줄이다. 인류의 문명에는 강이 항상 함께 했다. 영산강의 주변 지역에도 많은 고대 유적들이 흩어져있다. 영산강은 봉건시대 세곡을 수집하고 보냈던 곳이기도 하였다. 이곳은 조운철이 되면 사람과 곡물로 넘쳐났던 곳이다. 이렇듯 영산강은 우리의 것을 모두 품으며, 모든 것을 기억하며, 유유히 오늘도 흐르고 있다. 우리나라의 여름 철 강 주변 지역은 장마로 인하여 범람하는 곳이 많은데, 이는 지독한 가뭄이 든 해를 제외하고는 매해 계속되는 현상이었다. 영산강과 주변 지역도 마찬가지였다. 해방 이후의 영산강 주변의 경우 거의 매해 범람을 하였고, 이로 인하여 침수로 인한 이재민이 발생하였고, 농토는 잠겨서 벼 작황에 큰 영향을 주었다. 영산강 유역은 만성적인 한해와 홍수지역이었다. 1956년의 폭풍우 피해, 1957년 장마피해 등의 기록을 볼 수 있다. 1957년의 경우 특히 피해가 심하여 60년만의 홍수라고 표현되었는데, 나주군 총경지면적 1만 4천정보의 1/3이 침수피해를 입었고, ‘붉은 평야’라고 표현했을 정도로 그 피해가 심했다. 영산강이…
굶주림, 더는 견딜 수 없다 해방 이후 약 20여년간 우리나라는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 중 하나였다. 가난하였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의 소망은 ‘배불리 밥 먹는’것이었다. 가난과 굶주림은 우리의 앞세대를 괴롭히는 것이었다. 가난한 나라의 국민들의 가장 큰 소망인 굶주림을 벗어나기 위하여 할 수 있는 일은 결국 ‘식량증산’이었다. 특히 농업국가인 한국에서 굶주림을 벗어나기 위해서 할 수 있는 일은 농사를 잘 지어 배불리 먹는 것이 가장 먼저 해결할 과제였다. 농도인 호남은 바로 ‘식량증산’을 위한 현장이었다. 벼생산을 늘리기 위하여 할 수 있는 일 가운데 가장 현실성있는 것은 ‘농사에 필요한 충분한 물확보’, ‘논에 비료주기’와 ‘병충해 방지를 위한 노력-농약 뿌리기’가 있다. 당시 사람들에게 벼 수확량을 늘리는 것은 모두의 숙원이었고, 수확량 증가를 위한 도구가 물확보, 비료와 농약이었다. 비료와 농약을 얼마나 중요하게 여겼는지는 당시 신문을 봐도 알 수 있다. 1952년 8월 11일자 동아일보에 호남지방의 농사현황에 대한 기사가 있다. 이 기사에는 심한 가뭄과 함께 농작물을 살리는 방법으로 비료주기와 물공급을 들고 있다. 이 두 개가 제대로 되지 않아…
태극기와 함께 한 나주의 해방 일본의 무조건 항복으로 해방을 맞이하였다. 일본이 태평양전쟁을 일으키자 많은 지식인들은 일본의 패망을 예견하기는 했지만, 갑작스러운 해방이었기에 우리 민족은 해방의 기쁨을 함께 나누기 위해 광장으로 몰려들기는 했으나 맨손이었다. 나주에서의 해방은 다른 지역과 달리 태극기가 함께 하였다. 박준삼은 일제강점기 몰래 태극기를 감추어 두었는데, 해방이 되자 이 태극기를 가지고 나주국민학교로 향했다. 그는 태극기를 국기게양대에 걸고 나주민들과 함께 만세삼창을 했다고 한다. 나주민들이 얼마나 감격스러웠을지 상상만으로도 가슴이 벅차오른다. 박준삼은 태극기를 게양하고 만세삼창을 주도한 것으로 끝내지 않았다. 그는 나주건국준비위원회가 생긴 후 사직단에 가서 건준의 결성과 활동을 고했다고 한다. 전통시대 왕은 국가의 대소사를 사직단에 가서 고했는데, 이를 따라서 새로운 나라의 건설을 염원하는 마음을 담아 나주건준의 활동을 알렸다는 것이다. 이러한 행동도 새로운 나라의 건설을 경건한 마음으로 헌신을 다해 하겠다는 설레임과 책임감을 동반했던 것이라 생각된다. 앞선 세대의 해방에 대한 기쁨과 자주독립국가 수립에 대한 사명감과 책임의식을 느낄 수 있…
이화에 월백하고 배꽃(梨花)에 밝은 달빛(月白) 비추고 은하수(銀漢) 흐르는 깊은 밤 가지 하나에 깃든 춘심(一枝春心) 두견새(子規) 알까마는 다정(多情)한 것도 병이 되어 잠 못 들어 하노라. 고려말 이조년(李兆年, 1269-1343)의 시조로, 널리 애송되는 작품이다. 500년 전에 지어진 이 시조가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어 우리 백의민족의 마음에 하얀 배꽃을 피어나게 한다. 매년 4월 배꽃이 고웁디 곱게 핀 날, 광주의 한 시민단체 주관으로 “이화에 월백하고” 행사가 나주 배 과수원을 무대로 진행된다. 강원도 평창의 9월 보름날 메밀꽃이 핀다면 전라도 나주의 4월 반달이 뜨면 청초한 배꽃이 피어난다. 누군가 그랬던가, 배꽃은 가까이 보아야 예쁘다고. 나주의 특산물이 한 둘은 아니나 나주의 자랑거리가 어디 배뿐이겠는가. 하지만 “나주—”라고 외치면 먼저 배가 떠오르지 않을까. 요즘 젊은이들이야 나주의 대표 음식이 된 “나주곰탕”을 먼저 생각할 수도 있지만, 필자는 지금도 으슥으슥 추워가는 늦가을 오후 허기지고 목이 마를 때 약간 누리끼리한 껍질을 깎으면 하얀 속살의 단 물이 흘러내리는 배 맛을 잊을 수 없다. 맛도 맛이거니와 비싼 과일이라 귀하다는 점…
궁삼면이라 불리게 된 까닭 최일출이 지은 <나주궁삼면항일농민운동기념비>의 첫머리는 “국운이 기울면 오리가 발호하여 백성을 그 제물로 삼으니 이 고을 나주의 궁삼면토지사건이 그 본보기였다.”로 시작된다. 여기서 “오리”는 탐관오리의 오리(汚吏)이다. 밤낮으로 나락을 비롯한 온갖 곡식을 훔쳐 먹거나 갉아먹는 쥐만도 못한 인간, 그게 바로 탐관오리 아니겠는가? 무지렁이 같은 선량한 농민들을 등쳐서 제 배를 불리는 벼슬아치 한 명이 이른바 궁삼면의 수만 농민들을 무려 60년 동안이나 토지분쟁에 휘말리게 해서 피를 흘리고 목숨을 잃게 하였다. 토지회수투쟁이 전개된 나주들녘에는 당시의 상황을 알려주는 ‘궁삼면항일농민운동기념비’와 ‘오리비이설기(汚吏碑移設記)’가 서있으며, 문순태의 소설 <타오르는 강>은 이 사건을 다루고 있다. 궁삼면 토지회수투쟁은 1890년부터 1951년에 이르는 약 60년 동안 나주 농민들의 피어린 역사이다. 궁삼면은 행정구역상의 명칭이 아니다. 19세기 말 나주평야 일대의 3개 면, 즉 상곡·욱곡·지죽면을 지칭하는 용어이나, 잘못 불려진 것이다. 이 지역의 농경지 약 4만5천두락이 해괴하고 악랄한 방법으로 하루 아침에 엄귀…
그 이름만으로도 가슴이 벅찬 “청년” 한때 “Boys, be ambitious”(청년들이여, 야망을 가져라)라는 말이 유행한 적 있었다. 일본의 삿포로농학교(현 홋카이도대학)에 파견된 미국인 선교사 윌리엄 클라크(William S. Clark, 1826-1886)가 남긴 말이다. 일본에 고작 7개월간 머물다 떠나면서 그가 제자들에게 했던 말이란다. 어떻게 전해졌는지 모르지만 해방후 전쟁을 겪은 우리 국민들은 이 말을 금언으로 받아들였다. ‘대장부 한마디가 천금보다 무겁다(丈夫一言重千金)’고 했던가. 특히 현재 한국의 5, 60대들은 클라크의 말을 책상 앞에 붙여놓고 각고의 노력으로 청년시절의 꿈을 다졌다. 지금의 청년들이 들으면 전혀 실감할 수 없을지 모르지만. 우리 역사에서 혈기 왕성한 청년의 중요성을 체감하는 시기는 주로 변혁기였던 것 같다. 고구려 백제 신라가 쟁패를 다투던 삼국시대에는 청년들이 전사집단(戰士集團)의 총화(銃火)로 활약하였다. 신라의 이른바 화랑과 낭도가 대표적인 사례이다. 이들은 세속5계(世俗五戒)를 가슴에 새기고 전쟁터에 나가 그야말로 초개처럼 목숨을 던졌다. 일본이 조선을 침략하던 19세기 후반에도 우리 청년들은 나라를 사랑하고…